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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33)-유리왕이죽다-
작성일 : 2015.07.21
작성자 : 사무처
hit : 2775
고구려의 유리왕이 재위 36 년만에 죽었다.
자녀는 6 남 1 녀를 두었다 .부인은 송양의 장녀, 와 차녀 화희, 치희, 후비 ,해서 5 명이다
그는 주몽으로 부터 정권을 처음 인수 받았을 때만 해도 유리 왕은 제가의 의결을 존중했고 재사, 마리, 협부등 개국 공신들의 말을 겸허히 수용하며 정치를 잘 이끌어나 갔으나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때 아닌 도읍 이전으로 개인적으로는 신료들의 압력을 벗어나 왕권 강화를 통한 독재 체제를 확립 하였으나 많은 국가 재정의 탕진과 중국과 부여와의 잦은 전쟁으로 국내 사정은 그리 밝지 못한 세상을 살고 갔다
다만 중국의 왕망 정권인 신나라가 내홍에 휩쓸리고 부여가 형제들간에 골육 상쟁의덕으로 그나마 수행하던 전쟁으로 부터는 큰 손해는 입지 않았다
왕망과의 전쟁에서는 오히려 영토 확장의 기회를 받았다.
어쨋든 유리 왕은 죽고 그의 세째 어린 아들 무휼은 제3 대 고구려 왕으로 된다.
무휼은 유리왕의 두번째 부인 송양의 차녀 소생이다
무휼은 어릴때 부터 영리했다
유리왕 시절 한때 부여의 사신이 고구려에 와서 부여왕 대소가 보낸 서신을 통하여 같은 민족으로서 부여와 고구려는 장유유서로서 부여국을 섬겨야 함에도 유리왕은 태만히하고 있다고 유리왕을 꾸짖었을 때 유리왕은 부여왕 서슬에 위축되어 안절부절 못하자 어린 무휼 왕자가 당돌하게도 부여로 돌아가는 사신을 부뜰고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이야기를 대소에게 전하라면서 고구려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였다
누란지위(累卵之危)란 말은 "알을 쌓아 놓는자는 위태로울 것이오 쌓아 놓은 알을무너뜨리지 않는자는 안전 할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이말은 부여왕 대소가 두나라간의 전쟁의 위험을 자꾸 만들어 나가는것은 위태우로울것이며 반대로 설사 위험지경에 이르더라도 전쟁의 위험요소를 자꾸 만들지 않는것이 좋다는것으로 부여왕은 두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양국간의 불화를 이루지 말아 달라는 왕자의 당돌한 말이었다
부여왕은 당시 이를무시하고 처들어 오자 왕자가 처음으로 부여군을 맞이하여 학반령에서 적을 기습하여 이긴 얘기는 앞서 한바있다
무휼이 정권을 잡고 고구려 제3 대 대무신왕으로 등극 했을때는 중국에서는 왕망에게 반기를 든 적미의난과 녹림 의난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이때 유수라는 한 왕조의 일가 붙이가 혁명을 일으킨다
중국이 집안 싸움에 정신이 없을때 고구려는 과거 한(漢)나라가 차지 했던 지금의 난하 와 조백신하(潮白新河)사이에 있던 낙랑,진번 ,임둔 등 을 공격하여 일시 그들 군현을 점령 했었으나 부여의 압박으로 후퇴 지금의 만주 육고하(六股河)까지 물러나 고구려의 영토는 지금의 요하 서쪽 대능하(大凌河) 사이에 에 주둔하게된다
어쨋든 중국 내부의 내란은 고구려나 부여에게는 영토 확장의 기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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